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은 스테들러 루모그래프 2H, H나 3H를 쓰는 사람도 있다. 설계 현장에 컴퓨터로 제도작업을 하는 CAD가 도입되는 것은 아직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제도용 까만 연필심지와 심지홀더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직도 연필로 제도하는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 마쓰시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는데 읽을수록 좋아서 소장하고 싶어진다.

스톡홀름 시립도서관

건축가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을 설계한 군나르 아스플룬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읽다보니 참 잘 모르고 보고 왔구나 싶어서 아쉽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와 꽤 멀었던 거기까지 일부러 찾아가 보길 잘했다 싶기도 하다.

멀리 보이는 도서관 건물.

도서관 앞 공원.

입구.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아… 탄성이 나온다.

서가 윗층.

열람실. 모던한 조명.

가구며 조명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어린이 책 읽어주는 곳의 벽화.

건물 벽. 창문 모양과 틀 색깔.

언젠가 다시 가 볼 수 있을까.

다가오는 것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게 보니 나는 개탄할 상태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것을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 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파스칼, 팡세)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 영화 ‘다가오는 것들’

별의 인간

9월 어느날 뉴스를 검색하던 그는 ‘별의 동굴’이란 단어에 시선을 멈췄다. 아프리카의 한 동굴에서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몸이 작은 여성 과학자들이 25센티미터도 안되는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천오백여개의 유골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형태로 놓여 있었다. 과학자들은 장례의식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죽음 이후를 상상한 최초의 인류에게 ‘호모 날레디’라는 이름을 붙였다. 별의 인간. 그들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처음 동굴 안으로 들어간 과학자들이 보았을 수없이 많은 화석의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바닥에 흩어진 것처럼 보였겠지만 누군가의 애도에 의해 그들이 살았던 생의 내용과 그 질서를 전해주었을 화석들. 불현듯 자신이 먼 훗날 그해 여름을 별의 동굴이란 말로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 은희경, 별의 동굴, 중국식 룰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