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때때로 비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럭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한강, 희랍어시간

우리는 건강을 발명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1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띄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상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Lebendigkeit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신성하고 벌거벗겨져 있다.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모든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이라는 내재적 가치로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벌거벗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일뿐이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2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신성하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자본소득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삶이지 좋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정경제의 과업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화폐로 된 재산을 지키거나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운다. 이러한 신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삶을 위한 부지런한 노력이다. 하지만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갈망이 무한히 가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무한한 가능성도 갈망하게 된다”(정치학,1257b)
#2.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신의 죽음 이후 건강을 새로운 여신으로 선포한다. “(…)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한다. ‘우리는 건강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p.14)

– 한병철, 피로사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은 스테들러 루모그래프 2H, H나 3H를 쓰는 사람도 있다. 설계 현장에 컴퓨터로 제도작업을 하는 CAD가 도입되는 것은 아직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제도용 까만 연필심지와 심지홀더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직도 연필로 제도하는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 마쓰시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어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는데 읽을수록 좋아서 소장하고 싶어진다.

스톡홀름 시립도서관

건축가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을 설계한 군나르 아스플룬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읽다보니 참 잘 모르고 보고 왔구나 싶어서 아쉽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와 꽤 멀었던 거기까지 일부러 찾아가 보길 잘했다 싶기도 하다.

멀리 보이는 도서관 건물.

도서관 앞 공원.

입구.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아… 탄성이 나온다.

서가 윗층.

열람실. 모던한 조명.

가구며 조명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어린이 책 읽어주는 곳의 벽화.

건물 벽. 창문 모양과 틀 색깔.

언젠가 다시 가 볼 수 있을까.

다가오는 것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게 보니 나는 개탄할 상태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것을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 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파스칼, 팡세)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없이 지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며 환영의 매력은 그것을 준 열정만큼 지속된다.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가진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 영화 ‘다가오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