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면서도 우아하게

달팽이의 생활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을 발견한 곳은 “육상 연체동물의 생물학” The Biology of Terrestrial Molluscs에서 토니 쿡이 쓴 ‘행동생태학’이라는 제목의 장이었다. “되도록 자주 은폐된 장소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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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때문에 언제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나 자신의 생존이나 내가 속한 종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생명 자체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신생대의 마지막 시기인 홀로세때처럼 갑자기 대멸종 사건이 일어난다면 과연 어떤 종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까?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생명체들이 이 세상에 나타날까? 그 옛날에 과연 그 어떤 생명체가 우리 간은 인간이 세상에 나타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연체동물과 함께 사는 것은 행운이다. 연체동물이 살아온 시간은 우리 인간이 세상에 나온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긴 역사다. 육상달팽이, 그들은 앞으로도 낮이 되면 지구의 광대한 풍경을 가로질러 자신들이 파놓은 굴속으로 몸을 숨길 테지만 어두워지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밤새도록 느긋하면서도 우아하게 미래를 향해 수백만 년을 미끄러지듯 조용히 기어가면서 그들의 신비스러운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다.

–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달팽이 안단테

단맛이 있는 날

상준이는 에이, 왜 이렇게 진지한 분위기예요, 하고는 음료를 가지러 갔다. 온풍기 바람이 테이블 위의 촛불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나는 음영들은 어떤 몽상들을 불러냈다. 어두은 보일러실 계단을 내려가는 촛불의 움직임이었다. 따뜻하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함이 거기에 있다. 따뜻함은 너무 따뜻해서 잊게 하지. 강철의 추위나 모욕감 같은 것을. 그리고 잠들게 하는 것이다. 상상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발을 쭉 뻗고 팔베개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꿈도 꾼다. 집으로 가는 꿈을. 거기에는 어린 딸이 기다리고 푹신한 담요가 있다. 그러다 운이 나쁘면 어쩌다 좀 방심하다보면, 이유는 알 수 없는 거대한 불행이 일어나기도 하고 거기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특별할 것 없는 몽상들일까. 나는 마음 한편에 이는 불안을 꺼뜨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상준이가 가져온 진한 커피와 추로스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단맛이 있구나 하고, 어찌되었든 오늘도 단맛이 있는 날이긴 하네, 하고.

– 김금희, 보통의 시절.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어딘가 온난해진 탓에

이윽고 창석과 헤어진 소영은 지하철을 탈까 망설이다가 계속 걸었다. 어딘가 온난해진 탓에 이렇듯 생생하고 시퍼래진 추위를 느끼며 그런 심오한 균형의 원리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고 그래도 현실이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번 겨울에는 롱패딩이라도 한 벌 사야 하나, 외주비가 들어오면 그걸 그런 실물로 변신시켜 더 온난해져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의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대화를 나눈 창석이나 할머니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하지만 왠지 소영에게는 너무 중요해서 언젠가 꼭 쓰고 싶은 이야기를 잊기 전에 적어두었다. 어느 한파 속에 꾀병을 부리듯 침대에 누워 있던 대학 동창에게서 들었던 대화를, 적어도 소영의 머릿속에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적절한 격려와 존중처럼 느껴졌던 창석의 그 온난한 답변을.

– 김금희, 온난한 하루.
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우리는 건강을 발명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1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띄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상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Lebendigkeit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신성하고 벌거벗겨져 있다.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모든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이라는 내재적 가치로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벌거벗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일뿐이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2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신성하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자본소득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삶이지 좋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정경제의 과업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화폐로 된 재산을 지키거나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운다. 이러한 신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삶을 위한 부지런한 노력이다. 하지만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갈망이 무한히 가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무한한 가능성도 갈망하게 된다”(정치학,1257b)
#2.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신의 죽음 이후 건강을 새로운 여신으로 선포한다. “(…)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한다. ‘우리는 건강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p.14)

– 한병철, 피로사회

연필 깎는 소리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은 스테들러 루모그래프 2H, H나 3H를 쓰는 사람도 있다. 설계 현장에 컴퓨터로 제도작업을 하는 CAD가 도입되는 것은 아직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제도용 까만 연필심지와 심지홀더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직도 연필로 제도하는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 마쓰시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