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1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띄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상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Lebendigkeit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신성하고 벌거벗겨져 있다. 호모 사케르의 생명은 모든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이라는 내재적 가치로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벌거벗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생명의 성능을 극대화하는 일뿐이다. 성과사회는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도핑사회로 발전한다. 단순한 생명 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2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신성하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한 자본소득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삶이지 좋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가정경제의 과업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화폐로 된 재산을 지키거나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운다. 이러한 신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삶을 위한 부지런한 노력이다. 하지만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갈망이 무한히 가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무한한 가능성도 갈망하게 된다”(정치학,1257b)
#2.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신의 죽음 이후 건강을 새로운 여신으로 선포한다. “(…)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한다. ‘우리는 건강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p.14)
– 한병철, 피로사회